1) 부처는 왜 자아의 기능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부처는 그 자체로 온전함이라고 말해진다. 그 자체로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아라는 부분정신의 기능을 발현시킨다. 온전한 부처가 왜 자아를 필요로 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가 자기(Self)와 자아 둘 다를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와 자아, 즉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곧 '의식이 부처'임을 말해준다. 의식이 부처라면 자아는 부처를 지키고 키우는 보모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아라는 기능이 있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으로서 의식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기(Self) 혹은 부처가 의식을 강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체가 전체성이기 때문이다. 전체성이란 개별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부처는 무無, 즉 공空이다. 무와 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모든 개체성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성립된다. 시간과 공간은 자아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나'라는 인식주체가 있음으로써 상대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개별성이다. 인식주체인 '나'가 자신과 대상을 구분함으로써 의식의 발전은 진행된다. 그것이 없다면 의식의 발전과 강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식의 발전과 깨달음에 있어서 건강한 자아와 자아의 구조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가 자아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앞에서 부처는 무無 혹은 공空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충만으로서의 전체성이라고 융은 말한다. 그런데 충만한 무가 문제인 것은 그것에는 아무런 특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성은 오직 유有에서 나온다.
즉 유에 의해서 고유성의 윤곽이 형성되고 그것에 의해서 개별성을 완성할 수 있다. 개별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정신은 다시 무無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부처는 중생을 통해서만이 분리되지 않고 다시 통합하는 개성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조사들이 깨달음을 얻겠다고 모든 마음을 비우고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사어록을 보면 '사미승 혜능이 방아를 찧다가 삼매에 빠져버린 것이 옳은 일인가 잘못된 일인가'라고 묻는 질문이 나온다. 이것 또한 무에 빠져드는 위험성을 경계하는 말로써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다.
고유성은 자아가 '나'라는 인식을 만들어가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고유성은 개체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역사인 것이다. 그 역사를 알아내는 일이 바로 인간의 숙명적 과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 역사인 고유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다시 무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고유한 역사가 축적되어 있는 곳이 무의식이고, 그 무의식의 중심에 부처가 있다.
부처는 자아의 탄생과 성장의 근본이다. 자아가 부처의 존재를 아는 순간 자아는 자신이 정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아는 오만을 버리고 본래적 기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융은 상징을 본성에 내재하는 충동력과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 왜냐하면 상징은 충동력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본성의 무질서한 충동들은 성숙한 의식의 저항에 부딪치면서 변환이 일어난다. 융은 우리의 정신에는 충동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율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저 없이 가정한다. 즉 정신에는 순수한 충동에 대비되어 일어나는 정신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적 작동에 의해서 충동은 그것과 합치되는 유사한 표상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상징으로 나타난다.
충동이 상징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리비도가 충동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리비도는 물과 같은 성질을 가진 자연적인 경향(penchant)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표상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무의식의 구조를 이루는 원형들이다. 이 원형에 의해서 정신적 사건들이 움직여진다.
원형은 태고로부터 유전되는 형식(Formen)이다. 이 형식에 의해서 충동은 상징화되고, 인간은 충동의 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원형은 충동을 '창조적 환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내재된 정신적 체계다. 이것에 의해서 정신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진다. 이것은 상징의 형성이 정신 발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성욕(Sexuality)은 상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나 종교적 상징에 있어서는 신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금욕이 본질적으로 지양하는 바는 본능의 성욕 충동성에서 벗어남으로써 힘의 근원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역할에 필요한 것이 바로 원형적 유비들이다.
종교적 표상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상징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는 곧 무의식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상징적 진실은 종교적 믿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오성에도 부합하는 기초가 수립되어져야 한다는 융의 진심을 우리는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십우도의 소 역시 그러한 성적 충동력의 대응적對應的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융은 자신이 가장 숭고한 영적 상像에 대해 말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짐승 같은 것들과 연관 짓는 것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상징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이었다.
즉 상징의 암시성은 인간을 확신에 들게 하고 원형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에너지를 체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상징은 낮은 차원으로 흐를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상징들이 가지고 있는 변환자(Umformer)의 기능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상징성을 다루는 방법론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의식의 수준이 낮은 차원일수록 본능의 환상들은 살아있는 사물로서 인식되고 지각 또한 무의식적이다. 즉 무의식의 내용들은 현실적 내용이 되어 인간적 삶과 유리되지 않고 더불어 살게 된다. 상징이 상징으로서 해석되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일 때 인간의 삶은 고양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리비도는 육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육체에 머물러 있는 리비도는 정신적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종교의 근원은 정신에 존재하는 종교성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근본적으로 정신의 발현이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환상이 인간정신의 내용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종교는 인간이 경험한 내적 환상을 외적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내부세계가 외부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이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상징성이다. 불교 또한 육도 ⦁ 보살 ⦁ 부처와 같은 수많은 상징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의식의 내용들이 아니라 무의식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의식을 초월해서 있다. 그것은 의식의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상징성이 상징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상징성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정신이 훼손되거나 오도誤導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상징성은 의식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나는 종교성의 발현이다. 무의식에 있는 종교적 표상들이 물질적 매개를 통해서 표현된 것이다. 의식의 발달과정을 통해서 상징의 변천사를 조명한다면 초기의식에 가까울수록 상징성은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식意識이 발달하면서 정신의 상징성들은 현실의 세계 안에서 빛을 잃고 예배 의식儀式을 위한 상징성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하지만 최고의 의식성에 도달하면 상징성은 진리를 나타내는 방편일 뿐, 예배의식으로서의 가치는 축소된다. 불교에서 최고의 상징성은 바로 부처이다. 부처가 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법당에 가서 불상에 대해 예배를 올린다. 그 예배의 목적은 예배하는 그 자신이 바로 부처의 상징성을 그대로 닮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사선에서는 상징적 의식儀式에 대한 설법을 찾아볼 수 없다. 조사들은 오히려 상징성을 내면화시키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는 것에 대해 단호하게 내려친다. 왜냐하면 조사선의 주요 핵심은 실재성(reality)이기 때문이다. 조사들이 이처럼 단호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있다. 상징을 행하는 사람이 그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 상징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낮은 의식적 차원, 즉 불교적 용어로 말한다면 낮은 근기根機의 차원에서는 의식儀式행위가 잠재된 내부의 상징들을 일깨운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들의 설법은 낮은 근기(下根機)가 아니라 높은 근기(上根機)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징의 노예가 되어서는 결코 상징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다. 상징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는 본성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모든 상징은 비록 외부세계의 상像으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을 현실적인 것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는 현실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다. 사이비 교주들과 신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적 문란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는 경우를 우리는 드물지 않게 본다. 그것은 정신적 여성성과 남성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의 상징성을 육체적인 것을 잘못 인식하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물로 세례를 받는 예식에 참가하거나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일은 모두 재탄생의 의미를 내포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런 행위 자체로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징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징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상징성의 진정한 실현은 진정한 자기 관조와 진정한 자기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의식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의식성인 무아의식의 발현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무아의식의 발현시키기 위해서 먼저 요구되는 것이 바로 강력한 의식성이다. 의식의 힘을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의 중심인 자아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자아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기 위해 먼저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과 같다.
무의식의 내용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자아구조를 확고하게 만들어야만 무아의식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자아의 구조가 확고해졌을 때, 중생은 자신을 충분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