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4. 17:02

5. 목우 : 목동이 되다

1) 첫 번째로 근원적 마음이 희생된다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작업이었다면 영웅 신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영웅에 비유하는 것도 그것이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작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고도의 정신작업을 하기 위해서 그것에 맞는 조건이 발생한다. 

 

 즉 무의식을 만나는 일은 의식으로서는 상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과 동일시되면 자아는 팽창이 일어나고, 반대로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들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지면 정신의 해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아의 팽창과 해리를 피하기 위한 처방이 바로 황소를 길들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황소를 길들이는 일이 바로 자기 제약이자 자기희생인 것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것 같이 보일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지배하지는 못했다고 융은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소를 길들여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소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찾아서 원시적 상태로 남아 있는 동물적 본능을 길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언제든지 의식을 뚫고 나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삶을 파괴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를 찾지 못한 인간은 여전히 본성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지식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성범죄나 반사회적 행위들은 인간이 본성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이 드러나는 경우보다 드러나지 않는 경우의 수를 감안한다면 '성공적인 사회적 인간' 뒤에 숨겨진 동물적 본성에 우리는 경악을 넘어 절망할지도 모른다. 

 가장 높은 지식을 연마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에 부합할수록 본성은 억압되어 어두운 방에 갇히게 된다. 의식이 본성을 회피하는 한 그것은 '그림자'로 형성된다. 본성이 억압되면 잠재적 파괴력으로서 위험한 에너지가 되지만, 그림자를 의식화하면 생명력의 근원으로서 건강한 에너지가 된다. 

 

 지식은 지성과 논리를 키우고 '합리적인 정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합리적 정신'은 정감(情感, affect)이나 정동(情動, emotion)과 같은 본성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러한 것들을 억압하게 만드는 구조로 성장한다. 그러한 것들이 자기 안에 있음을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합리적 정신'에게 본성의 힘은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합리적 정신'으로 사는 '사회적 인간'들에게 본성의 경험들은 정신분열증을 겪어야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지식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내적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성은 정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성은 억압되고 외면될수록 더 큰 힘으로 압축되기 때문에 결국은 파괴적으로 의식을 덮쳐버린다. '합리적 정신'이 전체 정신을 지배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본성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그의 기분이나 정동을 조절할 수 없는 한, 그리고 무의식의 요소들이 그의 계획과 결정에 교묘하게 끼어들고 있는 은밀한 방법들을 그가 의식할 수 없는 한 결코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들 무의식적 요인이 존재하게 된 것은 원형의 자율성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분열 상태를 직면하지 않기 위해 칸막이를 쓰고 있다. 즉 외부생활과 자신의 영역은 별개의 서랍 속에 보관해 두고 결코 서로 대면시키지 않는다.  <인간과 상징>

 

 그러므로 소를 찾고 소를 길들이는 길만이 자기 영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거친 황소와 같은 본성에 직면했을 때 의식성이 분열되지 않고 무의식의 내용들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수용하기 위함이다. 즉 본성의 의식화를 위하여 의식의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본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자기 본성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본성도 자아도 부처도 중생도 모두 하나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는 더 이상 깨달으려고 하는 인위적인 의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자아의 상대의식이 무아의 절대의식을 경험함으로써 모든 인위성의 주체였던 자아가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근원적인 힘으로서 신성력神性力을 가지고 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것은 부처의 상像으로 나타나는 신비의 에너지일 것이고,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리스도의 상으로 나타나는 신비의 에너지일 것이다. 충동을 희생시키는 상징으로서 황소가 제물로 바쳐지지만 사실 황소는 신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황소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신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은 단지 영웅의 일부로써 희생된다. 동물로 상징되는 것은 자신의 충동성이다. 충동성은 인간 정신에 내재한 동물적 성질이다. 즉 동물의 희생은 충동성에 대한 포기다. 그것은 오직 자유의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웅은 자유 의지로 희생하는 자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즉 의식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첫 번째 희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독자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 바로 '근원적인 마음의 희생'이다. 

 

모든 것을 둘러싸는 세계의 혼으로서 푸루샤는 또한 모성적인 특성을 갖는다. 근원적 존재로서 그는 원시적 상태를 나타낸다 : 그는 둘러싸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미 둘러싼 것이다. 즉 어머니와 태어나지 않는 아이, 구별되지(구분되지) 않는 무의식적 상태다. 그러한 존재인 그는 끝이 나야 하고, 그는 동시에 퇴행적인 그리움의 대상이므로 희생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구별되는 존재, 즉 의식의 내용이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명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융은 『리그베다』에서 푸루샤 Purusha가 남자 혹은 인간으로서 근원적 존재임을 찾아내고, 푸르샤를 플라톤적인 - 세계(Weltseel)의 혼에 해당된다고 풀이한다. 

즉 푸르샤는 정신의 본질을 나타내는 '근원적인 마음(original mind)'이다.

 현대인들은 의식을 정신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사실 의식의 뿌리가 바로 이 '근원적인 마음'이다. 의식은 근원적인 마음으로부터 탄생한 정신의 외배엽이다. 즉 의식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이 '근원적인 마음'이 인간 인격의 전체였다는 것이다. 외배엽으로 성장한 의식이 분별력을 강화시키면서 자신의 뿌리인 '근원적인 마음'과 분리된다. 

 

 세계와 모든 존재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표상의 창조물인 한,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리워하는 리비도를 희생함으로써 세계의 창조가 생겨난다. 뒤를 돌아보는 자에게 세계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그 자체도, 다시금 그의 위로 몸을 구부리고 사방에서 그를 감싸는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이 상像과 상을 향한 그리움을 포기함으로써 근대적인 인식에 상응하는 세계의 상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단순한 기본적 사고에서 우주적 희생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 좋은 예가 용으로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의 원초적 어머니, 티아마트 Tiamat의 살해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바빌로니아의 원초적 어머니, 티아마트의 살해

과거를 그리워하고,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서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독립된 어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희생해야만 의식은 건강한 독자적 힘을 기를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나약한 자식이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끊임없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안온한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즉 아무런 갈등과 고통이 없는 고요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 그 자체로서 더 이상 성장이 없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들의 성숙한 삶, 영웅적 삶을 위하여 원초적 어머니, 티아마트의 어머니가 살해되는 상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세계는 인간이 세계를 발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초적인 어머니(Urmutter) 안에서 그의 은폐를, 말하자면 원시적이고 무의식적인 상태를 희생할 때 세계를 발견한다. 인간을 이러한 발견으로 몰아간 것을 프로이트는 '근친상간 차단(Inzestschranke)'이라고 해명했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어머니를 향한 유아적 갈망을 차단하고 리비도를 생물학적인 목표의 궤도로 가도록 강요한다. 근친상간의 금지에 의해 어머니에게 강탈당한 리비도는 금지된 어머니 대신 성적인 대상을 찾는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외배엽인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이 세계를 인식할 때 세계는 존재한다. 이것은 자아의식이 왜 눈•귀•코•혀•몸•의식이라는 지각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자아의식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을 외부로 투사함으로써 그 인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아의 주요 임무가 외부적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내부인식에 대한 가능성을 연다. 

 즉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이 물질에 투사됨으로써 인식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이 육체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된다. 육신이 없다면 정신에 대한 인식 또한 불가능하다. 이것은 또한 부처가 중생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융은 이것을 심리학적인 우주 진화론이라고 말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우주의 진화는 결국 의식의 발전에 의해서 가능하다. 의식의 발전은 의식을 성장시키기 위한 '근원적인 마음'의 희생이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근원적 마음'의 희생은 불성이 부처로 분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첫 번째 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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