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다
騎牛迤邐欲還家 소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소를 탄다는 것은 의식이 주도권을 가지고 무의식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을 인식함에 있어서 의식의 주도는 아주 중요하다. 만일 의식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식화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정신의 분열이고 의식의 파멸이다. 그러므로 소를 타고 소를 길들이는 의식의 기능은 무의식을 탐험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이다.
이미 잘 구축된 자아구조에 의해서 의식은 전혀 다른 법칙을 가진 무의식의 구조로 말려들어가지 않는다. 즉 '의식된 의지'를 가진 주체가 무의식에 순응하여 무의식이 이끄는 데로 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대의식으로서 무의식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식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무의식의 내용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어떤 것도 걸림이 없다. 집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부처가 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출발한다. 부처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판타지가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소를 찾은 사람은 안다. 깨달음은 부처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부처 혹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비우고자 하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리하여 자기밖에 있는 수많은 스승들의 방법론에 의지해서 이리저리 떠돈다. 나를 찾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아직 개별성을 얻지 못한 집단정신이다.
집단정신은 집단무의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집단무의식에 사로잡히면 집단정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집단정신은 고유한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단정신은 미숙한 정신이다. 즉 미숙함은 유아적 감정의 유약함과 무절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집단정신은 조직적인 종교나 단체 혹은 사상이나 물질에 의존된 정신이다. 의존된 정신에서 고유성의 발견은 있을 수 없다. 고유성은 오직 소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제 십우도의 영웅은 소를 찾아서 소를 길들였고, 이제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소를 찾기 이전에는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다. 즉 자기 내면의 소를 알지 못하고, 그 소를 길들일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십우도의 영웅은 자기 내면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있는 보물을 스스로 확인했다.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비로소 정상적인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羌笛聲聲送晩霞 오랑캐 피리소리 저녁놀에 실려 간다.
많은 번역서들이 이 문장의 첫 번째 글자 '강羌'을 오랑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강羌을 오랑캐로 번역하느냐, 그냥 감탄사 '오!'로 번역하느냐를 문제 삼아야 한다. 십우도의 여섯 번째 그림에서 소 등에 탄 목동은 피리를 불며 길을 가고 있다. 그러므로 피리는 오랑캐가 부는 것이 아니라 목동牧童 자신이 분다. 그렇다면 강羌은 오랑캐가 아니라 그냥 감탄사로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羌笛聲聲送晩霞 아! 피리소리가 저녁놀에 실려 간다.
피리는 영웅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에 필요한 몇 가지 마법들 중의 하나다. 피리는 모든 사람을 춤추게 하는 도구다. <원형과 무의식>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을 때, 혹은 목적한 바를 이루어냈을 때 사람들은 축제를 연다. 피리는 훌륭한 목동이 된 것에 대한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저녁놀은 무엇일까? 저녁놀은 낮의 세계가 밤의 세계로 넘어가는 단계다. 즉 의식적 인격의 인식주체가 무의식적 인격인 무아의식으로의 평화로운 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강제적 침입이나 점령이 아니라 합일로 일어나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의식은 무의식의 소리들을 거부감 없이 한가롭게 들을 수 있다.
一拍一歌無限意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피리소리가 한 박자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한 박자 한 박자에 담긴 의미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상대의식이 무의식을 대극으로 분리했을 때 무의식은 아주 불합리한 것들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오히려 삶에 방해가 되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변환의 비의(Wandlungsmysterium)가 일어나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다양성이 더 이상 거부 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
知音何必鼓唇牙 곡조 아는 이(知音)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 박자 한 곡조에 한량없는 의미를 담고 있는 연주를 하는 사람에게 굳이 '소리에 통달한 사람(知音)'이구나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에게 여실하게 있는 그대로 깨어 있음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존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계하고 고뇌하는 그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그것은 곧 존재의 의미와 본질의 발견이다.
자아의 상대의식은 스스로 만든 관념 때문에 실재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무아의식에는 존귀함도 하찮음도 없다. 아니 오히려 진리는 자아의식이 하찮은 것들이라고 거부한 무의식에 있다. 그러므로 무아의식은 하찮음 속에서 정신의 본질을 찾아낼 것이다.
무의식에 대한 이해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다. '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 나의 행위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두 무의식적으로 있는 한 '나'는 동물•인간•물건에 투사된다. 그래서 자아는 언제나 나의 동물, 나의 사람, 나의 물건에 집착한다.
심지어 신이나 부처에게 바치는 기도나 봉헌조차도 '나'의 기도, '나'의 봉헌이 된다. '나'의 기도, '나'의 봉헌을 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그 대가로 무엇인가 받으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 의도에는 신이 나 부처가 나를 지켜줄 것이고, 나를 잘되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요구가 내재되어 있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자아와 무의식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 자신의 그러한 의도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아는 모든 생각과 행위의 중심에 자신을 둔다. 그러므로 '나' 이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란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체성에 대한 경험을 방해한다. 전체성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자아의 희생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아도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자아로 사는 한 무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무의식은 잠이나 도취 상태, 혹은 죽음과 같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