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인위적 노력을 멈추다
제 7 송 : 망우존인忘牛存人
騎牛已得到家山 (기우이득도가산)
牛也空兮人也閑 (우야공혜인야한)
紅日三草猶作夢 (홍일삼간유작몽)
鞭繩空頓草堂間 (편승공돈초당간)
소를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소도 공空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는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띠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십우도>
소를 잊으니 그대로 사람이다. 즉 소를 찾고자 했던 자아의 상대의식이 초월되는 지점이다. 상대의식의 분별이 사라지면 소가 바로 소를 찾아다닌 바로 그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소와 자신이 하나임을 아는 그것이 바로 정신의 고향이다.
부처와 중생을 나누는 자아의 상대의식으로는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자아가 초월되면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자아의 입장에서는 '일없는 사람'이 된다. 이제 깨달음은 자아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찾아야 할 소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사람 또한 한가롭다.
『티벳 사자의 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어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티벳 사자의 서-융의 서문>
법신은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이다. 그 빛은 태양보다도 밝다. 그러므로 최고의 인식을 경험한 영혼이 아니고서는 두려워서 감히 볼 수 없다고 『티벳 사자의 서』는 알려준다.
존재의 순수한 빛을 십우도의 신화에서는 태양에 비유한다. 태양이 높이 떠올랐다. 그것은 최고의 의식 상태를 상징한다.
태양은 '삶의 원천이자, 인간의 궁극적 전체성의 상징'이자, 단일성(한마음)과 신성의 상징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소는 원시적 정신을 찾아 정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역사적 퇴행이다. 그것을 통해서 무의식과의 결합이 일어난다.
태양은 세계의 수태자이고 창조자이며 이 세상 에너지의 원천인 아버지 신으로서, 모든 생물이 그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어떠한 내적 분열도 모르는 자연물인 태양 속에서는, 인간의 심혼을 사로잡은 분쟁이 조화롭게 해결될 수 있다. 태양은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파괴를 할 수도 있다. •••••• 그런데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것은 태양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또한 태양은 의인과 악인을 동시에 비추며 유용한 생물이나 해로운 생물을 마찬가지로 자라나게 한다. 따라서 태양은 이 세상의 가시적인 신으로 그려지기에 적절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심혼이 지닌 충동적인 힘이다. 우리는 그것을 리비도라 부르는데,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 선과 악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 그것의 본질이다. •••••• 즉 내면화를 통해 그들 고유한 존재의 심층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태양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고유의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그것을 태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상징과 리비도>
태양은 세계를 창조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태양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태양의 근원적 세계는 선과 악이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태양은 선도 살피고 악도 살린다. 선과 악이 모두 태양의 창조물이다. 태양이 중천에 떠올랐다는 것은 분열된 내부를 통합으로 이끈다는 의미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른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현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은 자아의식의 좁은 영역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눈을 가리고 있던 자아의 껍질을 벗어던졌다는 것이다. 융은 태양을 우리 자신의 심혼이 지닌 충동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충동적인 힘은 망아적 리비도의 상징(ekststische Libidosymble)으로 나타나는 한마음을 향한 열정이다. 왜냐하면 빛과 불, 태양으로 형성되는 상징은 에너지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상징과 리비도>
태양은 연금술에서 황금과 동의어로 묘사된다. 황금은 햇살과 달빛으로 빚어지는 찬란한 물질에 대한 비유다. 황금의 묘약을 만드는 물질의 근거가 바로 신비를 경험하는 자신이다. 이것은 황금을 만들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정신적 변환을 의미하고 있다.
즉 황금 혹은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 높은 의식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인간과 문화>
해가 중천에 떠 있다는 말은 내면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는 말이 된다. 태양은 고유한 자기 자신의 발견이고, 고유한 자기 삶의 재창조를 위한 시작을 알리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람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의지를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아에 의해서 실현될 것이다. 그것은 생명에너지의 진정한 실현이다. 왜냐하면 생명에너지들은 자아의식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억압받았다면 이제는 그 어떤 걸림도 없이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내면에서 관조된 '태양에너지'의 예를 인도의 신화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Svetasvatara Upanishad』 3부에 있는 루드라(Rudra)의 구절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4. 신들의 창조자이며 수호자인 그, 루드라. 위대한 예언자, 옛날 히라냐가르바(Hiranyagarbha: 황금의 모태母胎)로 태어난 그가 우리에게 선한 생각을 불어넣어 주시길 ••••••.
7. 그는 저편에 있는 저고 한 브라만 Brahman을, 모든 피조물의 몸속에 숨어 있는 유일한 자로서,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에워싸고 있는 이 광활한 자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8. 나는 모든 어둠의 배후에서 태양과 같은 광채를 발하는 이 위대한 인간(푸루샤 purusha)을 안다. 진실로 그를 아는 자는 죽음을 넘어선다. 그 밖에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11. •••••• 그는 모든 존재의 동굴(심장) 속에 살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따라서 그는 도처에 편재하는 시바(Shiva)다.
12. 이 인간(푸루샤)은 위대한 주님이다. 그는 삶의 충동력이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근원적 힘이고, 빛이며 영원불멸하다. <상징과 리비도>
모든 신들을 창조하고 수호하며 또한 예언하는 루드라는 황금을 만들어내는 토대다. 그러므로 황금과 태양을 동의어로 본다면 루드라는 태양을 만들어낸 어머니이기도 하다. 황금과 태양의 모태인 루드라는 피조물의 몸속에도 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다. 그의 품은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광활하다. 피조물인 자기 자신 안에서 그를 알아본다면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태양과 같은 광채를 발하는 것은 푸루샤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는 것은 푸루샤, 즉 무아의식의 온전한 출현을 의미한다. 무아의식은 존재의 심장에 살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의식으로서의 통찰이다. 그러므로 무아의식의 출현은 온전히 새로운 삶, 오직 유일한 세계, 독자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창조적인 삶이다.
푸루샤는 삶이 일어나고 지속하게 하는 모든 충동력의 근원적인 힘이고, 그것을 의식하고 통찰하는 빛이며,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있어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불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엄지손가락보다 크지 않은 그 인간(푸루샤)은 내면에 거주하는데, 항상 인간의 가슴속에 살면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영靈으로 인지된다. 그를 아는 자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 엄지손가락, 닥틸렌Daktylen과 카비렌 Kabiren은 성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그것들은 인격화된 이미지의 힘이고 그러한 힘의 상징은 역시 남근(Phallus)이기 때문이다. 남근은 이러한 창조적 측면의 심리적 에너지인 리비도를 표현한다. 이 점은 꿈의 환상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수많은 성적 상징 전반에 해당된다.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상징을 말 그대로 취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기호학적으로가 아니라, 다시 말해 어떤 특정한 것에 설정된 기호로서가 아니라 상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엄지손가락 등을 통해 상징화되는 그와 같은 창조적 힘은 남근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혹은 그 근원적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을 묘사하는 그 밖의 상징들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다. •••••• 남근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데, 역시 어둠 속에서 그 일을 한다. <상징과 리비도>
상징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엄지손가락은 남근적 상징으로서 성욕에 비유되는 자연의 힘이다. 자연의 본질은 음陰과 양陽으로 되어 있다. 자연의 힘이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도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본성 그 자체가 선과 악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본성이 도덕성과 무관하다는 것은 진리다.
그런데 모든 생명은 모순적 본성에 의해서 창조되며 종족 또한 그것에 의해서 유지된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힘은 자립적인 생명체로써 인격적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직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목표 지향적 충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근거에 기초한다. 융은 자연의 힘에 대한 이러한 묘사들을 무의식의 생산적 측면이라고 설명한다.
디오니소스 제의에서는 남근이 하나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예컨대 아르기브의 황소-디오니소스 제의에서 그렇다. 그 밖에도 남근 모양의 신의 주상株像은 디오니소스-남근을 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것은 푸리아푸스(Priapus: 생식, 풍요의 신)이다. <상징과 리비도>
종교적 제의나 신의 주상株像들이 성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단순한 은유나 비유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리비도는 성욕•식욕•소유욕•과시욕•강박충동•복수충동•지배충동•종교적 충동까지 모든 자연적 상태에 있는 욕구다. 이 충동의 근본을 증식 본능(Propagationstrieb)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 정신의 발달과정 안에서 보다 복잡하고 세분화되어 간다. 물론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위한 열정 또한 이 자연적 욕구인 충동(Trieb)에 기초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충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충동은 진화과정 속에서 세분화되어 나타나지만 충동의 궁극적 방향은 최고의 인식으로 향해 있다. 즉 '목표 지향적 충동'에 의해서 분리된 정신은 통합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태양의 비유는 우리에게 늘 신들의 역동성이 심적心的인 에너지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바로 그것이 불사성不死性이다. 심적인 에너지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의 연속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생명에서 기인한 생명이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용솟음치는 생명의 근원은 전 인류의 원줄기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각기 개별적인 것은, 적어도 생물학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식된 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생명력, 즉 리비도는 태양으로 상징화되거나 태양의 속성을 지닌 영웅의 형상에서 인격화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남근적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심적인 에너지가 없다면 생명은 지속하지 못한다. 무의식은 가장 깊은 곳에 생명의 근원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무의식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인간이 의식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무의식의 힘에 의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무의식의 에너지는 생명에 힘을 불어넣고 지속시키거나 차단시키는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은 남근적 상징과 더불어 생명 에너지로 비유되며 정신의 중심으로서 자기(Self) 혹은 부처에 비유되는 것이다.
태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거대한 생산력은 인간 속에서 부처나 신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원형의 에너지다.
<상징과 리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