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5. 11:39

7. 망우존인 : 소를 버리니 그대로 사람이다

2) 의식의 정점에 이르다

태양의 상징성에 대한 설명은 연금술사들에 의해서 상세하게 밝혀진다. 연금술사들은 불꽃을 범심혼汎心魂 혹은 우주혼과 같은 정시적 성질로 받아들였다. 또한 불꽃은 무의식의 혼돈 속에 뿌려져 있는 인간의 이성이기도 하다. 해와 달은 자연의 빛으로서 자기(Self), 곧 부처를 상징한다. 

 자연의 빛인 자기(Self)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의식은 그것에 의해서 밝아지고, 무의식의 어둠도 밝혀진다. 그것에 의해서 삶이 비치지만 인간이 그것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도 물론 이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은 불완전하다. '완전한 자연의 빛'은 오직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우수한 존재가 되는 이유도 '완전한 자연의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빛은 '가장 값진 보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원형과 무의식>

 

 융은 요가의 심리적 과정에 대한 통찰을 아미타불 명상에서 찾는다. 아미타불은 '무한한 빛을 가진 태양의 불佛'이다. 아미타불 명상은 태양에 관해 집중명상을 한다 융은 태양에 관한 명상법은 감각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감각 강화를 위한 가장 흔한 최면 방법 중의 하나가 번쩍거리는 대상을 사용하는 것이다. 

 태양을 응시하는 것은 최면과 유사한 효과를 일으킨다. 태양 명상은 태양의 형태, 성질 및 의미들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태양의 둥근 원반은 둥근 환상물의 근본이 되어 지각을 만들어낸다. <인간과 문화>

 

 "삼매는 '정(定, Eingezogenheit)', 즉 모든 세계 관계가 내부로 흡수된 상태이다. 삼매는 팔정도의 여덟 번째이다. "
 <인간과 문화>

 이것은 내부로부터의 이해가 외부적 이해를 먼저 이행하고 습득함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태양이 나타내는 상징성은 의식의 명징성임이 드러난다. 

 

 안스로포스Anthropos는 희랍어로 인간이다. 여기서 포스 pos는 '빛'을 나타낸다.  
<서양 중세 연금술에서의 '안스로포스Anthropos'>

 다시 말해 인간은 빛, 즉 의식이고, 의식이 곧 인간이다. 의식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인간 존재의 기원을 '빛', 즉 의식과 동일시한다는 의미다. 태양이 높이 솟아올랐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의식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태양은 자아의 상대의식에 의해서 왜곡되고 한정된 밝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실재를 정직하게 조명하는 절대적 의식성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네가 다만 유위•무위의 모든 법(인연)을 여의어 마음은 마치 태양이 항상 허공에 떠 있어서 광명이 자연스럽게 비추지 않으면서도 비추는 것과 같이 되면 이것이 힘을 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이르는 때는 머무를 곳도 없다. 이것이 바로 제불의 행을 실천하는 것이며, '머무를 바 없이 더구나 그 마음을 낸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너의 청정한 법신이며, 아뇩보리라고 한다.  <전심법요•완등록 연구>

 

태양은 청정한 법신이며 아뇩보리다. 청정한 법신이 비추면 모든 부처의 행은 실천된다. 왜냐하면 청정한 법신은 자기 내면의 어둠을 비추지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정한 법신의 인식에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없기에 집착이 없고, 인위적인 노력이 없다. 그것을 저절로 일어나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이 최고의 의식성으로 비유되는 것이다. 

 

 설법도 자유자재, 마음으로 종지를 통달하니, 마치 해가 중천中天에 솟음과 같다. 오직 돈교의 가르침만을 전하며, 중생을 교화하여 삿된 종지를 타파한다. 가르침에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다. 만약 돈교의 법문을 익히면 어리석은 사람도 미혹함도 없어지리라. 법문의 설명은 비록 여러 가지이지만 이치에 계합하면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 번뇌의 어두운 집 한가운데서 항상 지혜의 태양이 떠오르도록 하라. 삿된 것은 번뇌 때문이요, 올바르면 번뇌는 제거된다. 삿됨과 올바름 모두 다 버리면 청정하여 텅 빈 깨달음에 이르리. 깨달음은 본래부터 청정한 것,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념이 된다. 
청정한 본성은 망념妄念 중에 있는 것, 마음이 바르면 세 가지 장애는 없어진다.  <돈황본 육조단경>

 

 혜능 역시 무아의식이 드러나는 것을 해가 중천에 솟아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해가 없는 어둠, 어슴푸레한 빛으로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은 무명이다. 무명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무명은 모든 것을 짐작하고 추측함으로써 실재를 왜곡한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명인 자아의식의 사사로운 분별성이다. 

 성품에는 본래 잘못된 것이 없다. 본성에 있는 것들은 정신을 구성하는 데 근원적 요소들이다. 그것들에 의해서 정신에 영양분이 공급되고 보호받으며 성장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자아의식이 그것을 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자아의식이 그것을 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자아의식이 그것을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그것들은 모두 망념이 되어버린다. 자아의식의 문제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는 파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아의 의식성이란 부분적 인식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자아가 내면에 무아의식이라는 무한한 인식능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의식적 한계를 명백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자아가 그러한 자신의 편견과 관념을 인식함으로써 자아는 인식의 중심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해가 가려져 있던 구름을 벗어나는 것과 같다. 해가 중천에 솟음은 가장 강렬하게 밝은 빛이다. 그 안에서 모든 진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전남 순천 송광사 십우도

 

  紅日三草猶作夢 붉은 해는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태양은 '융합'의 의미를 갖는 한마음(一心)이다. 즉 붉은 해가 높이 솟는다는 것은 무아의식이 명료하게 드러나 자아와 무의식을 숨김없이 비추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원형과 무의식>

 그러나 무아의 절대의식이 드러나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정신의 작용들은 변함없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좀 더 다른 점이 있다. 자아가 의식의 중심으로 있을 때는 자아의식이 부정하고 싶은 모든 마음의 내용들을 억압하거나 외면해 왔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자아의 저항이 걷어지고 나면 자신의 모습은 조금도 감출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비친다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동등한 자격으로 나타난다.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의 질서는 의식과 그 내용에 대해 대칭적으로 보완이 된다. 그때 반영되는 대상과 영상은 처음에는 아직 모호한 상태로 머문다. 그러므로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거울에 의해 정반대로 되긴 했다. 하지만 서로 일치하는 두 세계의 교차점으로써 '중심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칭화의 이념은 무의식을 인식하고 그것이 보편적 세계상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극점이 될 것이다. 무의식은 여기서 '우주적' 특성을 얻게 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무아의식은 중심의 출현이다. 왜냐하면 자기(Self) 혹은 부처를 인격의 중심점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중심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아래와 위 혹은 오른쪽과 왼쪽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균형이 잡힌다는 말은 대칭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의식 일변도의 인격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격의 중심이 자아가 아니라 무아가 되면 의식과 무의식은 동등한 자격으로 나타난다. 삼간三芉은 천芊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芊은 '풀이 우거져 무성하다'로 풀이된다. 즉 삼간 혹은 삼천은 '거듭 우거진 풀로 말미암아 꿈을 꾸고 있다' 혹은 '혼미하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풀은 무의식이다. 펼쳐지는 무의식의 내용들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마치 거울을 처음 대하는 비문명인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신기해하고 낯설어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동등한 자격을 갖는 일이 왜 중요한지는 "무의식은 여기서 '우주적' 특성을 얻게 된다"는 마지막 문단에서 찾을 수 있다. 

 

 의식이 무의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때 무의식은 단순한 동물적 성질, 원시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적 특성'을 얻게 될 때, 그것은 정신의 가장 값진 보물이 된다는 것을 깨달음을 경험한 많은 조사助士들이 기록하고 있다. 

 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관조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함은 진정한 통찰, 관조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태양이 진다면, 오 야나발키아, 달이 진다면, 또한 불이 꺼진다면 무엇이 인간에게 빛을 줄 것인가?•••••• 그렇다면 그 자신(아트만 atman) 빛을 비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自己, 심혼)의 빛이 있는 곳에서 그는 앉고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상징과 리비도>

 

 아트만 atman은 자기自己의 빛이다. 이 빛에 의해서만이 무명으로 있던 진정한 자기 모습이 실상을 드러낸다. 

 

鞭繩空頓草堂間 채찍과 고삐는 띠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이제 더 이상 소를 길들이기 위한 채찍과 고삐는 필요하지 않다. 인위적인 모든 노력은 자아가 정신의 주체로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제 정신의 주체는 무아다. 자아는 무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본래의 기능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정신의 본래 주인은 무아였음을 자아는 알기 때문이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