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5. 14:39

8. 인우구망 : 사람과 소를 모두 버리다

1) 원圓은 불성佛性이자 단일성의 상징이다

여덟 번째의 인우구망人牛俱忘에는 붓으로 원圓 그림이 그려져 있다. 둥근 모양(圓形)의 속이 텅 비었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은 일반적으로 온전하고 원만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공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전체성의 의미를 지닌다. 

 

 공(空)은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의 전체성이다. 헛된 투쟁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되었던 삶이 그것을 통해 다시금 가능하게 된다. 쿤달리니 요가에서 '녹색 모태'란 잠재 상태로 있다가 출현한 이슈바라(Ishvara : 주님, 시바Shiva신에게 부여한 칭호)를 지칭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공(空)은 원에 대한 상징이다. 원은 즉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공空이 곧 색色이다. 색色은 곧 무無다. 그러므로 무는 아무것도 없는 무가 아니라 가득 찬 것이기도 하다. 십우도 여덟 번째 그림인 공空 역시 허공과 같은 것으로서 텅 비어 있기에 또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성이다. 이원적 사고인 자아의식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무아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무아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전체성이다. 지금까지 자아의 상대의식에 의해서 분별되어 일어났던 모든 마음의 갈등과 투쟁들이 사라진다. 그것은 바로 실재를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던 자아의 방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적인 표현으로 원은 소우주의 '작은 세계(mundus minor)'이며, 마음의 중심으로서 우주의 내적인 상像이기도 하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원의 상像은 연금술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 가장 완전한 실체(Substanz)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세계혼(animamundi)'이며, 자연의 중심인 혼(anima media natura)으로서 첫 번째 창조된 빛이다. 대우주는 둥근 구球 모양으로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원의 상징으로 드러난 만다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십우도에 나타나는 원의 상은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지구의 여러 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관념들이라는 사실을 융은 입증했다. 즉 깨달음, 혹은 완전성에 대한 추구가 정신의 보편적 성질임을 알게 해준 것이다. 생명체의 근원인 불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연금술사들에게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보다 높은 영적 인간'인 아담 카드몬Adam Kadmon이었다. '보다 높은 영적 인간', 혹은 불성을 찾는 방법들이 다를 뿐이었던 것이다.

 연금술의 철학자들은 '신격의 상'이 물질 속에 잠자거나 혹은 감추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물질의 실험을 통해 그것을 찾고자 했다. 원은 '물질(Materie)의 잠긴 문을 여는 마술적인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완전한 존재로서 양성兩性적인 성질을 가진 완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상징된다. 

 

 양성적인 것을 심리학적으로 풀이한다면 의식과 무의식이고, 중국철학으로는 양과 음의 세계다. 그들에게는 보편적 인간, 현실적 인간을 상징하는 태초의 인간 아담은 무상無常한 네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인간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 영원한 아담을 찾아야 한다. 영원한 아담은 첫번째 아담의 육체 안에 있었기에 그것을 다시 태어나게 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로 태어나는 아담이다. 

 두 번째로 태어난 아담은 원을 발견한 사람으로 순수한 불멸의 정수로 이루어져 있다. 불멸의 정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는 영원성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만다라

융 심리학에서 만다라는 단일성의 상징이자 개성화의 상징이다.  <원형과 무의식>

 단일성 혹은 개성화는 분리된 정신이 한마음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다라는 정신적 균형이 필요할 때 그 모습이 드러나거나 정신의 불균형을 치유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진정한 만다라는 항상 (적극적인) 상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성되는 내적인 상이다. 더욱이 정신적 균형에 장애가 생긴 경우, 혹은 어떠한 생각이 신성한 교의에 내포되지 않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때 만다라가 생겨나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만다라는 객관적 정신의 결여로 인해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의식만이 정신의 전부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무의식의 정신은 부정된다. 이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의식의 일방적 발전은 무의식을 배제시키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정신은 불균형이다. 

 그러므로 만다라의 생성은 정신의 중심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작용인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불균형을 치유하기 위한 경우에 나타나는 만다라는 그 중심에 붓다나 도르예dorje 혹은 그리스도와 같은 중요한 상이 있어서 그 상이 강조된다. 중심에 있는 그림들은 모두 정신적인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Self) 혹은 부처를 상징한다. 중심에 부처가 있는 만다라를 경험한다면, 부처를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상대로서의 주체가 있다는 말이다. 즉 여전히 자아가 인식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에 신의 형상이 있는 만다라는 중심에 있는 형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목적을 가진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중심에 있는 상들은 정신의 잃어버린 중심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아가 중심에 나타나는 상과 자신을 동일시해버릴 경우, 자아의 팽창이 일어난다. 즉 나는 신을 만난 특별한 사람이 된다.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한,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상태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여전히 신과 나를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사고다.

 

 이원론적 사고는 정신의 분리 상태다. 신과 자신, 즉 자아와 부처(자기Self)가 동일한 본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그것은 주체적 삶이 아니라 종속적 삶이다. 깨달음은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깨달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십우도의 원에는 중심이 비어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만다라와 십우도 만다라의 차이점이다. 

 

 "그대 마음의 텅 빈 충만(空)이 곧 불성佛性임을 인식하고,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그대 자신의 생각임을 안다면 그대는 성스런 붓다의 경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십우도의 둥근 원은 안에도 밖에도 그림이 없다. 그 중심이 비어 있다는 점에서 공空이다. 공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얻어지는 인식의 최고 정점이다. 자아가 자발적으로 자기 존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못 박혀 죽음으로써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부활하는 거룩한 변화를 나타낸다. 자신의 소를 찾아 소를 길들이는 목동이 되어 돌아와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소, 즉 자아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아의 희생됨으로써 자아의 인격은 무아의 인격으로의 변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만다라가 보여주는 공空은 분리된 자아의식과 무의식이 하나가 되는 한마음이다. 

 

 중심이 비어 있는 원은 아무것도 없는 무가 아니라 진정한 충만充滿이다. 불성은 '나'라고 하는 중심이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융의 서문>

 

 십우도가 나타내는 빔(空)은 동일시할 자아가 이미 초월되고 인식의 중심에 무아가 드러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무아의식은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상징이며, 대극을 화해시키는 매개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은 더 이상 대극으로 분리되지 않고, 무아의식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의식의 중심이 자아에서 무아로 이동된 것이다. 이것이 아홉 번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근원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이 비어 있는 십우도의 만다라는 더 이상 신격을 상징하는 마술적인 원이 아니라 정신의 중심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심자리가 드러남은 인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중심자리는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전체성이다. 자아의 초월로 의식은 최고의 명징성에 도달한 것이다. 최고의 명징성은 정신이 함유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어느 것 하나 빠뜨리거나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은 분리되어 있던 의식과 무의식, 선과 악, 중생과 부처가 '합일하는 상징'이자 완전한 조화의 감정으로서 원만성(Vollstandigkeit)이다. 원의 중심이 비어 있음은 '나'라는 개별적 인식의 주체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아'이고 '절대정신' 혹은 '절대적 객관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무아의식에 의해서 어둠 속에 있던 무의식은 명료한 의미를 드러낸다. 무아의식은 중생과 부처라는 대극을 화해시키고 혼돈의 정신을 새로운 질서로 편입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세속적인 인간이 영적인 인간으로 변환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2) 원은 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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