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은 순환이다
대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큰 수레다. 수레는 바퀴와 원의 상징이 담긴다. 융의 표현대로 공(空)은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의 전체성을 나타내듯이, 대승은 어느 것을 선별해서 태우는 작은 수레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큰 수레다.
대승大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개인의 해탈解脫에 주력하는 소승小乘에 대對한 것이라는 표면적 의미를 제외한다. 그러면 그 본질적 의미는 내적內的•정신적精神的인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대승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 또는 일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사로움은 자아의 성향이다. 그러므로 대승은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고, 자아의 초월이 바로 무아無我다. 즉 무아가 바로 대승인 것이다. 소승이 밝음, 도덕성, 선함, 아름다움의 측면을 추구하는 것은 나약한 자아의식의 구조를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거기에 비해서 대승은 자아가 추구하는 의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자아에 의해서 분리되어 내버려진 무의식의 측면, 즉 어두움, 비도덕성, 악함, 추함까지도 인식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큰 수레를 의미하는 대승의 의미는 연금술에서도 그 의미가 그대로 살아있다. 바퀴에 대한 연금술의 해설이 참 인상적이다.
바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연금술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순환과정(circulatio)'을 지칭한다. 그로써 한편으로는 '상승'과 '하강', 예컨대 날아오르고 낙하하는 새(침전하는 수증기)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의 전범이 되는 우주의 진화와 또한 작업이 성립되는 해(年)의 주기周期를 말한다. 연금술사는 '회전(rotatio)'과 그의 원圓 그림의 관련을 의식 못하는 것이 아니다. 바퀴에 대한 동시대의 도덕적 비유는 무엇보다도 신의 인간으로의 하강과 인간의 신으로의 상승을 말하는 '상승'과 '하강'을 강조하고 있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바퀴는 구른다. 구른다는 것은 순환이다. 바퀴는 회전하지만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서 굴러간다. 바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신은 인간에게로 내려옴으로써 인간의 변환이 일어나고, 인간은 변환에 의해서 신으로 상승하게 된다.
이것을 십우도의 신화에 유비시켜 본다면, 자아를 초월함으로써 무아를 맞이하게 되고, 무아에 의해서 온전한 부처(佛性)를 이루게 된다. 즉 의식이 신의 경지로 고양되는 것이다. 신의 경지가 바로 절대의식인 무아의식이다.
바퀴에 관한 뵈메의 해석은 연금술의 신비적 비밀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보거나 심리학적 관점으로 보면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즉 바퀴는 여기서 만다라의 상징성에서 핵심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악의惡意의 신비(mysterium iniquitatis)까지도 포함하는 전체성의 표상으로서 나타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바퀴는 만다라의 상징성에서 그 핵심을 나타낸다고 융은 말한다. 왜냐하면 만다라의 중심은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는 하나의 정신적인 인격의 중심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은 모든 것을 생산하는 어머니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본성은 선과 악을 근원으로 한다. 그러므로 모든 탄생은 선과 악을 함께 굴리고 있다. 마치 음과 양이 합해서 하나의 생명체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선과 악의 원리에 의해서 모든 탄생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를 찾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그 근원에는 선과 악이 있는데, 선이 무엇인지 자아구조의 강화 과정에서 이미 알게 되었다. 이제 선의 반대편에 내버려 두었던 악의 측면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할 차례다. 선과 악을 모두 담는 것, 선과 악을 모두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체성의 표상이고 온전한 정신성이다.
악을 알려면 악을 명상해야만 한다. 악을 명상하면 악의惡意가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형상에 대해서 알게 된다. 악을 소멸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곧 신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악을 소멸한다는 것은 신의 몸을 절단하는 일이다. <상징과 리비도>
악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무아의식의 통찰에 의해서 의식화해야만 한다.
의식화는 한마음으로의 통합이다. 통합에 의해서 선과 악이 더 이상 투쟁하지 않고 조화로워질 수 있다. 그것은 악의 성질을 생산적 에너지 기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즉 자아의 지독한 자기중심적 이기심이 아니라 원만한 자기 보호기능의 역할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자기 이해의 가장 근원적 인식이다.
둥근 형태는 완벽한 단순성을 나타낸다. '나'를 중심으로 분별하고 계산하는 자아의 상대의식은 혼돈의 복잡성이다. 만다라의 원은 무아로서 정신의 중심점이다. 중심점에 의해서 의식과 무의식은 한마음을 이룬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순환적 발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십우도는 9단계에서 완성으로 해석되어 버린다. 원은 한 번의 완성이 아니라 순환적 발전을 계속한다. 즉 나선형적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선형적 과정이란 원점에서 시작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지만 출발했던 그 원점이 아니다. 순환은 늘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지점에 있었던 적이 없다.
그러므로 원은 깨달음의 완성이나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남, 재생 혹은 치유를 나타낸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정신의 주체를 자처했던 자아의 상대의식이 본래의 기능으로 돌아가고, 무아의 절대의식이 정신의 주체로 들어선 것이다.
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원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가 아닌 둘의 분리된 정신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것을 융의 언어로 바꾸면 '중앙'은 '순환적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장소이다. '창조적 변환'의 장소인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